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풍전쟁 (문단 편집) === 펑위샹 세력의 붕괴 === 국민정부의 선전과 더불어 전부터 장제스는 한푸쥐를 하남성 주석, 스여우싼을 안휘성 주석으로 임명하여 회유했고 이에 한푸쥐, 스여우싼 등이 동요, 펑위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뤄양의 한푸쥐가 호당구국군을 이탈하며 중앙 옹호의 통전을 보냈고 23일 장제스는 한푸쥐를 13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주었다. 이에 뤄양에서 한푸쥐와 펑위샹 부대들이 충돌하는 형국이 벌어졌다. 이에 스여우싼까지 동관에서 정주(鄭州)로 철수해버렸다. 이때 전 제3집단군 총사령 [[옌시산]]이 타이위안 회의를 발기하여 펑위샹에 대한 체포령을 취소하면 자신과 펑위샹이 함께 하야하여 외유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옌시산은 이때 장제스와 반풍 삼각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장기적으로 장제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펑위샹의 병력이 보존될 필요가 있다는 현실주의적인 계산 아래에 펑위샹에 대한 유화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미 광서파가 궤멸했고 펑위샹마저 궤멸한다면 홀로 남은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대항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질 것이 틀림없었고 장제스의 목표도 자연스레 그로 집중될 것이었다. 펑위샹은 불리한 형국을 인정, 5월 27일 하야통전을 보내고 입산독서를 선언했다. 장쉐량 역시 펑위샹이 완전히 몰락하면 중국 내부의 세력균형이 무너진다고 여겨 펑위샹의 출국을 만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처음에는 토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탕성즈 등을 동원하여 하남으로 진군시키고 옌시산에게도 토벌 동참을 요구했다. 물론 6월 10일의 국민당 3기 2중전회에서 펑위샹 문제를 상정하지 않음으로 그를 완전히 몰아붙히진 않았다. 한편 장쉐량은 펑위샹의 붕괴가 확실시된 시점에서야 장제스를 위해 일부 병력을 출병시켜 산해관에 배치했는데 어디까지나 동맹자인 장제스와 옌시산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6월 15일, 장쉐량은 [[장쭤샹]], [[만푸린]], [[장징후이]] 등 50여명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동북사성 최고 군사회의 예비토론회를 개최하고 6월 24일 정식 군사회의를 열어 장제스와 옌시산이 베이핑, 톈진을 봉천에 양도하겠다고 표명했다면서 평진지역의 접수를 논했다. 하지만 만주 구파가 관내진출을 완강히 반대하여 봉천군벌의 관내진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